내 문장에는 부유(游)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나는 중학생 때 처음으로 삶의 부유를 자각했다. 모든 것은 만지면 허물어질 듯 위태로웠지만 나는 그 위태로움이 위태롭지 않았다. 나는 주로 방관하고 자주 물러섰다. 삶은 어디에도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그저 이리저리 떠돌며 마음을 주었다가도 다시 가져갈 뿐이었다. 늘 말하지만 무엇에도 간절하지 못했다.

천착하지 않는 것과 부유하는 것 중 무엇이 먼저 일어나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 둘이 상관관계를 가짐은 분명하다. 천착하지 않는 것은 부유하고 부유하는 것은 천착하지 않는다. 내게 있어 현상은 그저 현상이었다. 돌이켜볼 때, 그것은 시간의 덧없음과 연관되어 있지 않나 싶다. 시간이 흐르면 지나가기에, 나는 사건도 감정도 그저 느낌의 층위에서 머물기를 바랐던 것 같다.

얼마 전 일대종사를 보았다. 일대종사는 많은 면에서 화양연화를 닮아있다. 화양연화가 그랬듯 일대종사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라지는 것들에 천착하는 모습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이다. 보면서 조금 눈물이 났다. 궁가의 64수 같은 것들은 결말이 어찌되든 좋다. 중요한 것은 궁이가 궁가의 64수에 매달리던 그 시절, 궁이 스스로가 가장 아름답다 기억하는 화양연화의 아름다움에 있다. 나는 내게 일대종사의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것을 알지만, 생각했다. 매달리는 일의 처연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더 이상 모든 일을 느낌의 층위에 맡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집착할 것이다. 물고 늘어질 것이다. 부유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는 스크린을 앞에 두고 오래오래 다짐했다.

덧붙이자면, 왕가위는 전경보다는 클로즈업에 더 강점이 있는 감독이다. 일대종사에서는 발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부자연스러울 만큼 많은 잔상을 남기고 발들은 천천히 움직인다. 발바닥은 내내 바닥에 붙어있다. 그 모습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Posted by 노랑 가방 :

글을 쓰고 싶다

2013. 8. 22. 03:35 from 카테고리 없음


글은 언제나 가장 간절한 비명의 형태여야 한다는, 그런 강박관념이 내게는 늘 있다. 글이란 누구의 말마따나 너무 사랑해서 늘 지고 마는, 그래서 안 쓰고 싶어도 쓸 수 밖에 없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무엇도 쓸 수가 없다. 어떤 것에도 간절한 마음을 갖지 못한 지 너무 오래 되었다.

그러나 때때로 먼지처럼 부유하는 나의 세계가 간절해질 때, 나는 그 마음을 글보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술로 흩어놓는다. 문득 내가 글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은 내가 술을 합법적으로 마실 수 있게 된 시기와 맞물리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술을 마시면 못다 지른 비명은 이내 사그라든다. 타다 만 소망들이 재가 되어 내 목구멍을 막아 나는 이제 숨을 쉬기가 어렵다.

오늘은 내가 소년이던 시절 썼던 글들을 찾아 읽었다. 활자화된 비명은 처절하고도 아름다웠다. 나는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고도 썼고 클리셰 같지만 정말로 글과 결혼하고 싶다는 말도 썼다. 좆같다고도 썼고 사랑한다고도 썼다. 좆같은 너를 사랑한다고도 썼다. 훌륭한 소년이 되지 못한 채 내 소년 시절은 토막난 글처럼 끊겨 버렸다. 이제 나는 좆같은 사랑이 뭔지 이해할 수조차 없고, 소년 시절의 나는 생경한 모습으로 활자 안에 박제되어 나를 노려본다.

나는 그저 관성처럼 살아가고 있다. 죽고 싶다는 마음은 오랜 시간 나를 지배했지만 이제는 그 마음조차도 소망하지 않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구하는 바가 없으니 글을 쓸 수도 없다. 비참함이 찾아올 때면 몇몇 타인과 신변잡기를 안주삼아 술을 마신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글을 쓸 수 있던 당시에는 미처 몰랐다.

다시 글을 쓰고 싶다. 소망이 생긴다면 모두 태우고 싶다. 이제 숨을 쉬고 싶다. 살아지는 것이 아닌 살아가는 것을 택하고 싶다.


Posted by 노랑 가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