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주정

2014. 3. 30. 20:04 from 카테고리 없음

고민하는 것들. 내가 문학을 평생 업으로 삼고 살 수 있을까. 의지와 능력의 문제. 나를 채우는 것은 문학뿐이고 다른 일을 하며 살아가는 나는 도저히 그림이 그려지지 않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의심하게 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신형철은 서른셋에 첫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를 냈는데, 십 년 후의 내가 그런 글을 감히 쓸 수나 있을까. 변덕 많은 내가 중간에 지치기라도 하면 돌아갈 곳은 대체 어디인가.

하지만 카페꼼마에서 책들에 둘러싸여 이토록 충만한 기분을 느끼고 있으니 다시 나는 믿을 수밖에 없다. 더 물러설 곳이 없다고, 그저 읽고 쓰는 수밖에는.

삼 월이 다 가기도 전에 서울에는 벚꽃이 피었다. 봄바람 속에서 진한 브라우니를 안주 삼아 버니니를 마시는 낮, 권여선을 읽고 성석제에 대해 쓴다. 작가론을 쓸 사람으로는 결국 권여선을 택했다. 권여선의 작품이 문학적 빚을 지고 있는 팔십년 대의 교정은 이제 삼십 여년의 시간이 지나 내 앞에서 푸르다. 그녀와 시공의 축 중 하나를 공유하고 있음에 새삼 감사하다.

문학에 대해 생각할 수록 나는 점점 더 입을 닫게 된다. 사람들 앞에서 어떤 말을 꺼내야할 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제는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너 말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아는 나와 사람들이 아는 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차안에도 피안에도 진실은 존재할 것이다. 나는 어느 하나가 옳다고 아득바득 우기는 어리석은 일을 오래 전에 멈췄다. 그저 입을 닫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가끔 네 꿈을 꿨다. 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착하네, 예쁘네 말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춤을 추었다. 그러나 모두 옛날 일이다. 어느 시처럼 전에는 꿈이 꿈인 줄 모르겠더니 어느 순간 아, 꿈이로구나 알게 되었고 이제는 네 꿈을 꾸지 않는다. 잘 기억하는 법만큼 중요한 것은 잘 잊는 법이다. 시간에 따른 망각이라는 생의 권능에 감사하며 나는 너를 잊어가고 있다.


상수에서 부리는 한낮의 주정.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있다. 모든 것이 꿈일 지 모른다는 가능성에 기대어 삶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Posted by 노랑 가방 :

역사를하노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 끄집어내놓고보니 도무지어디에선가 본듯한생각이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들이그것을메고나가더니 어디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 위험하기짝이없는큰길가더라.

그날밤에 한소내기하였으니 필시그돌이깨끗이씻겼을터인데 그이튿날나가보니까 변괴로다 간데온데없더라. 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참이런처량한생각에서 아래와같은작문을지었도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없소이다. 내차례에 못올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그러면 내내어여쁘소서

어떤돌이 내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시는 그만찢어버리고싶더라.

 

  학교 수업에서 이상을 읽고 있다. 첫 수업은 이상의 시니컬한 웃음에 대해서만 긴 이야기를 듣다가 끝나버렸다. 그때 선생님이 그토록 강조하시던 시니시즘은 이 시, 그러니까 이런 시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오늘 봄비가 내리리라는 소식을 듣고 이 시를 아침부터 자꾸 읽었다. 이런 날이니, 요즘 고민하던 것을 잠깐 내려놓고 그저 내내어여쁘소서하는 구절만을 곱씹어도 좋을 것 같다.

  이상 수업을 듣기 전,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라는 완성되지 못한 절이 뜬금없이 머리를 맴돌던 날이 있었다. 이것은 이상의 날개에 나오는 구절이다. 정확히는 머릿속에서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라는 문장인데, 여기에서 왜 그 일부만 떨어져 나와 생각이 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요즘 내 머릿속에서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인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고민하고 있는 지점이다.

  인간에 대한 애정 없이 인문학을 붙잡고 있을 수 있는가? 애정 없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오랫동안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할 수 있는가. 사실 인문학까지 갈 것도 없다. 무엇을 하든, 인간에 대한 애정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곧 로봇의 행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만이 희망이라는데, 나는 희망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듯하다. 자꾸 절망이 애정의 빈자리를 채우려 든다.

  특히 어제는 이 생각에 사로잡혀 너무 힘들었는데, 우연히도 집에 돌아가니 엽서가 도착해있어 위안이 됐다. 부재중인 것들이 모두 엽서처럼 와주었으면 좋겠다. 아무 내용이나 담고 있어도 혹은 담고 있지 않아도, 그저 존재만으로 위로가 되는 것들이 있다. 위로받을 것도 없는데 자꾸 위로받고 싶어지니 이상한 일이다. 어쩌면 나는 시니시즘의 강박에 매여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에서 탈출한다면 다시 인간을 믿고 사랑할 수 있을까. 인간이 지겨운데도 한편으로는 인간 혹인 인간의 그 무엇에서 위로를 찾는 심리는 대체 어떤 것일까. 모르는 것 투성이다.

  아무튼 다시 시 얘기로 돌아와서, 이상은 그만찢어버리고싶더라고 하면서도 결국 찢지 않고 시를 남겼다. 최근 나는 이야기 보존의 욕구에 대해 계속 생각 중인데, 시를 찢어버리고 싶지만 찢지 않는 마음 역시 이 욕구와 맞닿아있으리라 믿는다. 말하지 않는다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죽어버릴 이야기를 되살리고 싶다는 마음과, 부끄럽고 내밀한 자신의 삶을 시간 뒤로 감추고 싶다는 마음 사이에서 전자가 이긴 것이다. 이러한 역사가 반복되며 이야기는 시나 소설이나 희곡의 형태로 축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과연 이야기 보존의 욕구만이 창작의 원동력인가? 이러한 전제 하에서 이야기의 화자와 청자는 혹은 작가와 독자는 완전히 단절된 관계에 놓이게 된다. 화자는 자신의 욕구에 충실할 뿐이며, 청자는 제가 듣고 싶은 것만을 듣고 찾고 싶은 것만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야기를 하는 입장이 되어보았다면 알 것이다. 청자나 독자의 존재가 이야기의 방향, 혹은 앞서 이야기의 존폐 여부에까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말이다. 이를테면 이상의 이런 시에는 금홍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뒷말이 붙는다. 이때, 찢지 않고 남겨둔 것은 이상의 독백 혹은 방백이 아니다. 그것은 수신인을 분명히 밝힌 편지이며, 그러니 찢지 않고 남겨둔 것은 수신인에게 이 글을 읽어달라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그렇다면 또 궁금해진다. 화자가 염두에 둔 청자는 어떤 태도로 글을 읽어야 하는가. 화자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주변인의 성격을 가진 청자는 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그들이 읽어내야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메시지는 왜 굳이 문학이라는 비효율적인 형식을 이용하여 전달되었는가. 학문적으로 이것을 연구하고자 할 때에는 어떤 방법론을 택해야 옳을까.

  질문이 많으니 글이 질척해지는 듯하다. 금홍이 내내 어여뻤는지는 지금에 와서야 알 길이 없으나, 저런 시를 받고도 내내 어여쁘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죄악이 아닌가 싶다. ‘내내어여쁘소서라니, 참 봄비 같은 소리다. 창밖을 보니 글을 쓰는 동안 봄비는 그쳤나 보다. 차마 잊지 못하는 그런 마음을 생각하며, 뻘소리를 접는다.

Posted by 노랑 가방 :

무슨 서운하긴
다 길 따라 가기 마련이지만

누워있으면 가을 공기가 가만히 몸 위로 내려앉는다. 개강으로 피곤한 와중에도 새벽에 깨어있는 데 익숙해진 몸은 쉽게 잠들지 않고, 나는 가을 공기 아래에서 느리게 숨쉰다. 호흡을 통해 가을이 내 안을 흔들고 간다.
가을이다. 서울의 가을은 맑고도 쓸쓸하다.

길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보통의 존재는 누구나 가는 길을 가면 되는 것이겠지만 나는 보통의 존재 주제에 욕심이 많아서 괴롭다. 마음도 능력도 욕심을 따라가지 못한다. 현실과 타협할 줄 아는 것도 세상 사는 능력이라는 생각이 요즘 자꾸 든다.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지금껏 되는대로 살아온 시간들이 후회스럽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역시 어쩔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그저 계속 앞으로 달려갈 뿐이다. 많은 삶들이 불나방처럼 어디론가 뛰어들고 있는 가운데, 내 삶이 뛰어드는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곳에서 나는 웃으며 타들어갈 수 있기를 감히 소망해본다.


Posted by 노랑 가방 :